오늘의 처방전(책 한 구절)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책마을 2024. 10. 9. 20:43

 

그렇게 42킬로그램까지 살을 뺐을 때, 사귄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K가 대뜸 자신의 친구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사귀는 동안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던 나의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었다.

"친구들이 너 예쁘대."

...

'거봐, 내가 해냈어. 나 예쁘지? 사랑받을 만큼?"

 

 

 

우울증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울은 어렵다. 우울증을 겪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 의학 지식이 풍부하고 증상을 기민하게 살필 줄 아는 나의 부모님조차 가족 상담을 받아야 했으니, 우울은 누구에게나 확실히 어렵다.

...우울증에 걸리면 무기력해지기 쉬워서 주위에서 조언을 해 준다한들 그것을 실행할 힘 자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 그런 점에서 슬픔은 상처와 같고, 우울은 상실과 같다.

슬픔은 회복될 수 있어도 우울은 완전한 회복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도닥이는 것이다.

이미 뚫린 구멍에 다시 찬바람이 들어차지 않도록 계속 살피고 돌봐야 한다.

무리해서 다가오려는 엄마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아빠보다 모든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더 편했다. 사랑해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가족보다 이성적인 타인이 때로 더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나는 아마 음식의 맛보다 엄마의 애정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병원에 가는 게 좋았다. 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낼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 좋았고, 약을 먹으면 감정 기복이 줄어드는 것도 좋았고, 엄마와 함꼐하는 시간도 좋았다.

고통스러웠던 중학교 시절, 정신 병원에서 보낸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따뜻한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