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처방전(책 한 구절)

미술관 읽는 시간 - 정우철

책마을 2023. 7. 6. 18:08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미술관이 되기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환기 미술관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철두철미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 되려면 먼저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인생의 뮤즈, 김향안과의 만남

김환기는 집안 간의 합의에 따라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과 혼인함.

...이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유산을 집안의 소작농에게 나눠줬다. 그때 사랑없이 결혼한 아내에게도 거액의 위자료를 주고 이혼흘 하게 됨.

...

한편, 변동림도 천재 시인 '이상'과 결혼했지만 결국 사별한 상태였다. 김환기와 변동림은 한 시인의 소개로 서로를 알게 되었다... 이후 1944년 평생을 기약했다.

...변동림 집안의 결혼 반대에 부딪치자 그녀는 집안을 나와 개명까지 감행한다. 변동림이 사라지고 김향안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이 함께 머무는 보금자리의 이름을 '수향산방'이라고 지었다. 

 

 

환기 미술관은 장욱진 화백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최-페레이라' 건축에서 설계한 건물이다. 

2014년 김수근 건축상, 영국 bbc '2014년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에 선정된 건물이기도 하다.

 

환기 미술관은 전에 갔다왔다.^^

 

클럽 에스프레소(문블렌드), 환기 미술관, 부암동 골목길 산책, 통인시장 (tistory.com)

 

클럽 에스프레소(문블렌드), 환기 미술관, 부암동 골목길 산책, 통인시장

오늘 갑자기 클럽 에스프레소에서 문프 블렌드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갔다. 그런데... 아는 쌤이 말씀해주시길 딱 1년 전이 문대통령 마지막 퇴근길이었다고 한다.

jajakjajak.tistory.com

 

 

 

장욱진의 <자화상>

 

장욱진 화백이 덕소에 산적이 있었다고?

1963년부터 1975년까지 '덕소 시기'

<진진묘> 역시 이 시기의 작품

장욱진의 <가족>

어찌나 따뜻한 색감인지

장욱진 <진진묘>

 

장욱진 화백은 '화백'이나 '교수'보다 집 자가 들어가는 '화가'란 호칭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즐겨 하던 말 중 "집도 작품이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 화백은 지인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서 잡부 자리를 얻게 된다.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 또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해 초상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로 <나목>을 쓴 박완서 작가와의 인연이 생긴다.

...

20살 박완서는 정규직 영업사원, 30대 후반 박수근은 비정규직으로 그림을 그렸다. 박완서가 영어로 미군을 불러주면 박수군은 미군의 손수건이나 스카프에 가족, 애인의 모습을 그렸다.

... 당시 박완서 작가는 정규직으로 비정규직들에게 은근한 갑질을 하며 자신의 불행에 한 줌의 위안으로 삼았다고.. 후회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혜석 화백의 '이혼 고백장'

이혼한 여자가 직접 적은, 사상 초유의 이혼 경위서였다.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나혜석 화백은 자신의 글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만인이 깨닫길 원했다. 거기에 최린을 향해 당시 돈 만2천원이라는 거액의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다. 

 

 

이응노 - 1967년 어느날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서 연락이 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끌려간 아들이 북한에 있다는 것. 그리고 동베를린으로 오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 그는 이후 몇 번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아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이 화근이 되어 이응노는 간첩으로 몰리게 된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었다.

......

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답답해 눈물만 나왔다고 한다.

이 마음을 어떻게 풀까... 화가에게는 그림뿐이었다. 그는 종이가 없어 무엇이든 생기면 그림을 그렸다. 먹다 남은 밥풀을 뭉쳐 조각을 만들었고 휴지에 간장으로 그림을 그렸다.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그는 약 3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